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의 대통령
프랑스 좌파와 사회당을 상징하는 인물들 중 첫 손에 꼽히는 인사로, 프랑스 정치사 특히 제5공화국 이후의 현대 정치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의미로든 매우 크다. 미테랑은 1958년 10월 제5공화국 성립 이후 20여년간 좌파가 정권을 잡지 못했던 상황을 타개하고, 선거를 통해 실권이 있는 대통령제에선 '수평적 정권교체'를 처음 실현해냈다.
긍정적
지금도 프랑스 사회당을 비롯한 프랑스 진보 세력의 정치적 대부 격으로[20] 많은 프랑스인들이 기리는 대통령이다. 특히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프랑스에서 최초로 그것도 장기집권한 좌파 지도자였고,[21] 이후 프랑스 좌파와 우파가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진행하는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 되었다.
내치 부분에서도 임기 초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진보적 아젠다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외에도 반시위법 및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등 인권 문제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수십 억 유로를 들여 미테랑 도서관을 만들고 영화 산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문화 사업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부정적
집권 직후 그가 펼치고자 했던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이 재정 문제로 실현되지 못하고, 되레 그 이후론 신자유주의적 긴축정책을 시행하면서 지지자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실제 아탈리에 의하면 미테랑은 초기에 단행했던 개혁들에 대해 상당히 만족감을 보였으나, 이후 추가적인 개혁을 원치 않아보였다고 한다. 때문에 88년도에 좌파가 다시 승리하며 실권을 되찾았을 때도 경제 등 내치 분야는 총리에게 거의 전적으로 일임한 채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권 후반부부터는 냉전 종식 관련해서 동유럽 자본주의화와 독일통일, 소련 붕괴 등 워낙에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격변기여서 아예 내정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었다.
사후 르완다 내전에서 정부군의 학살에 무기를 지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비판받기도 했다. 다만 이건 르완다 내전이 발생한게 1994년인데, 이때 프랑스는 여당이었던 사회당이 하원선거에서 대참패를 겪으며 우파들이 대거 당선되어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중심으로 2차 동거정부가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만 책임을 묻기는 애매하다. 실제 훗날 르완다 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에두아르와 다른 프랑스 공직자들이 연루되어있었다고 한다. 물론 미테랑의 실권 여부를 떠나서, 본인이 프랑스 대통령으로써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건 비판받을 여지는 있겠지만. 특히 국방, 외교 분야는 외치에 관한 것으로 명백히 대통령 소관이다.
1985년 7월 10일, 프랑스의 남태평양 핵실험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치면서 뉴질랜드 오클랜드 항에 정박해 있던 민간환경운동 단체 그린피스 선박 "레인보우 워리어(Rainbow Warrior)" 격침 명령을 내린 것으로도 비판을 받는다. 좌파 정권의 수장이란 사람이 핵실험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우파 정권에서도 함부로 안 할 군사작전을, 그것도 우방국인 뉴질랜드에서 저질렀다는 것. 심지어 이 사건으로 사망자도 1명 발생했다. 이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 시절까지 프랑스 대통령들은 좌우 가리지 않고 핵무기를 자국의 강대국 지위를 보장하는 기반으로 절대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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